머쯔님 커미션 햇빛이 창문틀을 훑으며 엷게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요며칠 줄곧 흐리던 날이 오래간만에 조금이나마 밝아진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때였다. 구름 사이로 간신히 드러난 해가 릴리안의 앞에 놓인 찻잔 테두리를 흘겼다. 짧고 따가운 반짝임과 정통으로 마주친 바람에 릴리안은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고요한 집이었다. 이 곳은 대부분의 경우 늘 그래 왔기 때문에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게 유지되는 공간. 무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사용인이 먼저 알아차린 뒤 부족함을 채워주는 곳. 백작 부인이 된 이후 누리게 된 생활의 격에 적응하는 것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완벽하게 익숙해진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일부터 백까지 남의 손을 타는 것보단 뭐라도 직접 하..

아침님 커미션 눈이 아릴 정도로 짙은 파랑이 여자의 옆에서 넓게 융단을 깔았다. 해안선은 끝이 없었기에 검푸른 융단은 여자의 뒤편으로도 이어졌고, 그래서 그의 사방 풍경 절반을 뒤덮는 바다를 남자는 까만 눈으로 응시했다. 눈앞의 모든 광경이 정지해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지상, 움직이는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아 그저 흩어진 별 아래로 물결치기만 하는 바다, 새까만 그 풍경들 속에서 모래처럼 빛날 듯 빛나지 않는 별들. 그 모든 것을 누군가 정교하게 만들어 숨을 불어넣은 듯한 마네킹처럼 응시하는 릴리안 윌킨슨. 여자의 양아들은 풍경을 향해 날숨을 내뱉었다. 아마도 내 출생은 저주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함께 보기로 약속하여 그토록 기다리던 바다에게 당신을 이 빼앗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

치이 님 커미션 1 신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다. 신이 있었다면 나시사를 그대로 뒀어야 했다. 그 애는 잘못한 게 없는 애니까. 걔는 따뜻한 애였다. 사람들은 전부 나시사에 비해서 내 성격이 좋다고 얘기했지만 그건 모르는 새끼들이 하는 얘기다. 나는 모든 걸 적당히 넘기기 때문에 서글서글하게 구는 거고 나시사는 모든 것을 적당히 넘기지 못하기 때문에 방어적이 된 것이다.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소중히 여기는 건 신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인데 그걸 나시사는 하고 있었다. 나는 나시사가 나중에 커서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대단할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나보다는 분명히 나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무엇이 되든 상관없으니 누군가의 어머니는 되지 않아줬으면 하고 바랐다. 어머니가 된 ..

소문의 실체 written by. 갱임 https://gangster929.tistory.com/257 선물 감사합니다! #withLove

치이님 블릴 커미션 1 그 남자는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새하얀 낯에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는 으레 여자에게 인기를 끌기 좋았고, 그래서 나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이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여자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내가 한 번 치대 보지 못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남자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물에 잠긴 듯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름이 뭐예요? 에반입니다. 그쪽은? 아, 저는 홀트라고 불러 줘요. 여자는 비밀이 많은 법이지. 홀트, 는 내가 종종 쓰는 성이었다. 정말 나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성의 진실 여부가 어찌 되었든, H로 시작해서 T로 끝나는 짧은 단어를 입에 담자, 남자의 표정은 종전보다 제법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는 의자에 늘어지..

치이님 블릴 커미션 1 미친 년놈들, 뒈져버리라지. 나는 기숙학교에서 매번 그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집에 있는 어머니랑 아버지가 불이 나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집에 있는 어머니랑 아버지가 마차를 타고 런던까지 가다 사고로 뒈졌으면 좋겠다, 아니면 독살이라도 당했으면 좋겠어…뭐 그런 것들이었다. 내 이런 사고들을 불효라고 말하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셋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둘이었다. 내 입지는 집에서 기르는 개새끼만도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물리적 폭력을 당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그냥 그 집에서 없는 존재였다. 나한테 잘해주는 건 유모 뿐이었다. 유모는…유모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아직도 좋아한다. 어머니랑 눈 색이 똑같은 사..

치이님 블릴 커미션 1 우리는 뛰었다. 탈출이었다. 숲의 공기는 서늘하고 상쾌했다. 우리가 탄 말의 발은 빨랐다. 어떤 하인도 우리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사람들의 떼가 우리를 가리키며 소리지르는 것이 보였다. 도망…부인이…잡아서 형벌을…부정한 여인…단죄를! 그런 소리들이 띄엄띄엄 들려왔다. 나는 남자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아, 얼마만에 진심을 다해 웃는 것이었던지. 내 뒤로 멀어지는 성은 컸고, 또 견고했다. 나는 그 성에서 영원히 빠져나온 사람이었다. 누구도 다시 나를 그 성으로 집어 처넣지 못할 거였다. 나는 순간 내가 어릴 적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말을 타고 들판을 뛰놀던 시절들, 아름다웠던 15세의 여름. 지금 이곳은 여름의 빛이라고는 어디에도 없..

치이님 블릴 커미션 1 윈더미어 저택 근처 호숫가에는 요정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블레이크는 그 말을 제법 철썩같이 믿는 눈치였다. 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만들어 낸 동화는 단순한 소문에 살을 붙인 형태였다. 사람들이 요정이 나온대, 라고 말하고 넘긴다면 아이는 구체적인 시간과, 그 요정의 생김새와, 지위까지를 말했다. 요정 여왕은 새벽에 나와요. 밝은 갈색 머리에, 하늘색 눈을 가졌죠. 아이는 노래하듯이 읊었다. 아마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티타니아랑도 아는 사이일 거예요.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어요, 아는 사이인지를요. 그 애는 요정 여왕 얘기를 할 때 유독 생기가 돌았기 때문에, 나는 마나님이 애를 헛바람 들게 했다고 잔소리를 하실 것을 알면서도 그 ‘요정 여왕’ 놀음..